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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오락용 조폭 영화 정도로 얕잡아 보고 틀었습니다.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 제가 앉아있던 자리가 어딘지도 모르게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 부산을 배경으로 깡패와 권력이 한통속이 되어 활개 치던 그 시절을, 이 영화는 고발 다큐도 아니고 진지한 역사극도 아닌 방식으로 — 징글징글하게 살아남는 소시민 악당의 눈을 통해 — 완벽하게 해부해냈습니다.

 

범죄와의 전쟁 포스터
범죄와의 전쟁 포스터

"우리가 남이가" — 야합과 처세술의 민낯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건 범죄 영화가 아니라 처세술 교과서다"였습니다. 주인공 최익현은 깡패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대로 된 권력자도 아닙니다. 세관원 출신의 어중간한 위치에 선 인물이 자존심을 팔고 굽신거리며 살아남는 과정이 이렇게까지 리얼하게 그려질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불편하고 찝찝했습니다.

영화의 배경인 1980년대는 한국 현대사에서 권위주의 통치(authoritarian rule) — 쉽게 말해 법보다 인맥과 힘이 앞서는 구조 — 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던 시기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남이가"라는 한마디는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부패와 야합을 정당화하는 만능 면죄부였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알겠는데, 지금도 조직 생활을 하다 보면 이 논리 구조가 얼마나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는지 섬뜩할 때가 있습니다.

최민식이 연기한 최익현의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 여기서 캐릭터 아크란 인물이 이야기를 거치며 내면적으로 변화하는 궤적을 말합니다 — 는 단순한 욕망의 상승 곡선이 아닙니다. 그는 올라갈수록 더 많이 구부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인간 군상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인물이 오히려 순수한 악당보다 훨씬 공감이 가고, 그래서 더 불편합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기록에 따르면 이 영화는 2012년 개봉 당시 관객 470만 명을 돌파하며 그해 한국 영화 흥행 상위권에 올랐습니다(출처: 한국영상자료원). 단순한 오락 영화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이 불편한 이야기에 공명했다는 뜻입니다. 아마 스크린 안의 익현이 스크린 밖 우리 자신과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 최익현: 세관원 출신, 비상한 처세술로 부산 암흑가에서 생존하는 소시민형 악당
  • 최형배: 부산 최고의 깡패, 주먹의 논리로 세계를 지배하는 원초적 권력자
  • "우리가 남이가": 지연·혈연 기반의 야합 문화를 상징하는 이 영화의 핵심 코드
  • 1980년대 권위주의 시대: 법보다 인맥이 앞서는 구조가 두 인물의 상승을 가능하게 한 토양
요약: 최익현의 비열한 생존기는 1980년대 권위주의 사회의 처세술을 가장 리얼하게 보여주는 거울이다.

 

누아르 미학과 시대풍자 사이의 윤리적 함정

솔직히 이 영화를 보면서 제가 실수한 부분이 있었는데, 하정우가 연기하는 최형배에게 감탄하고 심지어 응원하는 제 자신을 한참 뒤에야 발견했다는 겁니다. 그가 저지르는 악행의 무게보다 그 카리스마와 대사의 질감이 먼저 뇌리에 박혀 버렸습니다. 이게 바로 이 영화가 가진 누아르 미학(noir aesthetics)의 마력이자 함정입니다. 여기서 누아르 미학이란 범죄와 어둠을 매혹적이고 스타일리시하게 포장하는 영화적 장치를 뜻합니다. 악인을 멋지게 그릴수록 그 악행의 윤리적 무게는 상대적으로 희석될 수 있습니다.

윤종빈 감독의 연출력이 탁월한 지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납니다. 시대 부조리에 대한 고발을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풍자(satire)와 블랙 코미디의 형식으로 비틀어 관객이 웃다가 뒤통수를 맞게 만듭니다. 풍자란 사회의 모순이나 부조리를 우스꽝스럽게 과장하거나 비꼬아 비판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덕분에 이 영화는 단순한 오락물도, 딱딱한 시대극도 아닌 독특한 위치를 점하게 됩니다.

제가 특히 감탄했던 건 대사의 질감입니다. 부산 사투리와 당대 속어가 뒤섞인 대사들은 배우들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느낌이었고, 이는 상당한 고증과 리허설의 산물일 겁니다. 영화진흥위원회(KOFIC)는 이 작품을 2010년대 한국 범죄영화의 분기점으로 평가하기도 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대사와 캐릭터의 리얼리티만큼은 한국 영화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평가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제 경험상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랫동안 씁쓸한 뒷맛이 남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시대를 잘 타고난 악인들이 결국 양지에서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영화가 끝까지 직시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비열하고 얍삽할지언정 기가 막히게 살아남는 속물근성(philistinism) — 여기서 속물근성이란 도덕이나 원칙보다 실리와 생존을 앞세우는 세속적 처세 본능을 말합니다 — 이 어떻게 시대를 관통하는지, 이 영화만큼 리얼하게 보여준 작품을 저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요약: 누아르 미학의 매력이 악행의 무게를 희석시키는 윤리적 함정을 품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 영화를 잊히지 않게 만드는 핵심이다.

 

자주 묻는 질문

Q. 범죄와의 전쟁,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건가요?

A. 직접적인 실화 영화는 아니지만, 1990년 노태우 정부가 선포한 실제 '범죄와의 전쟁'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당시 부산을 중심으로 한 조직폭력배와 권력의 유착 구조는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문제였고, 영화는 그 시대적 토양 위에 픽션을 얹은 방식입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직접 봤을 때 가공의 이야기임에도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현실감이 꽤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Q. 최민식이랑 하정우 중에 누가 더 돋보이나요?

A. 저는 이 질문이 오히려 이 영화의 강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두 배우의 앙상블이 어느 한쪽이 압도하지 않고 서로를 완벽하게 받쳐주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최민식은 굽신거리면서도 눈빛만은 살아있는 익현을, 하정우는 주먹 하나로 세계를 지배하다 시대에 뒤처지는 형배를 각자의 방식으로 소화해냈습니다. 굳이 고르라면 저는 최민식의 내면 연기 쪽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Q. 폭력 수위가 높아서 보기 불편하지 않나요?

A. 폭력 장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영화의 무게감은 잔인한 장면보다 대사와 상황의 리얼리티에서 옵니다. 오히려 유머와 블랙 코미디 요소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예상보다 훨씬 유쾌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다만 영화가 끝나고 난 뒤의 씁쓸함은 꽤 오래갔습니다.

 

Q. 1980년대 배경을 몰라도 재밌게 볼 수 있나요?

A. 충분히 재밌게 볼 수 있습니다. 시대 배경을 알면 풍자의 층위가 더 풍부하게 읽히는 건 사실이지만, 영화 자체가 그 시대를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구성이라 사전 지식 없이도 흐름을 따라가는 데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제가 처음 봤을 때도 역사 공부를 하고 간 게 아니었는데 몰입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결론

정리하면,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는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부패한 권력 구조를 가장 사람 냄새 나는 방식으로 해부한 작품입니다. 건조한 고발도, 무거운 역사극도 아닌, 비열하게 살아남는 소시민적 악당의 눈을 통해 시대의 민낯을 들춰내는 연출적 선택이 이 영화를 10년이 지나도 회자되는 수작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누아르 미학이 악행의 무게를 희석시킬 수 있다는 윤리적 함정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함정을 알면서도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서 긴 여운을 갖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이 영화의 힘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직 보지 않았다면 최민식과 하정우의 앙상블에만 집중해서 보셔도 충분한 값어치가 있는 영화입니다.

참고: https://youtu.be/69RJZ7TwDrQ?si=rIAp3ldZ4rWi480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