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집이 없다는 것을 단순한 빈곤의 문제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는 일급 5만 원짜리 가사 도우미로 살면서도 위스키와 담배와 사랑을 놓지 않습니다. 집을 포기하면서까지 지키려 한 것이 '취향'이라는 사실이, 제게는 꽤 오래 남았습니다. 취향이라는 마지막 방어선미소가 고집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싱글 몰트 위스키 한 잔, 그리고 담배 한 개비. 이 두 가지를 지키기 위해 그녀는 월세를 포기합니다. 처음 이 설정을 접했을 때 저는 솔직히 "이게 말이 되나?" 싶었습니다.그런데 통계를 들여다보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국토교통부의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2023년 기준 1인 가구의 월 평균 주거비 부담률(RIR, Rent to Income R..
갑자기 모든 게 멈춰버린 느낌, 살면서 한 번쯤 겪어보셨을 겁니다. 저는 한동안 그 상태가 꽤 길게 이어졌는데, 그 시기에 우연히 만난 독립영화 한 편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오랜 세월 영화 프로듀서로 일하다 하루아침에 백수가 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씁쓸할 것 같지만, 막상 보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맑은 국물처럼 데워지는 묘한 영화입니다. 인생의 낙오자가 된 것 같은 공허함, 찬실이도 그랬다제가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일이 잘 안 풀리던 시절이었습니다. 남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는데, 저만 홀로 제자리에 묶여 있는 것 같은 감각. 그 불안감이 꽤 오래 지속되던 때였습니다.찬실이는 오랜 세월을 바친 감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
전화 한 통으로 평범한 주말 오후가 인질극으로 돌변한다면, 그 공포가 진짜로 느껴질 수 있을까요. 저는 영화 〈리얼타임 콜〉을 보며 그 질문의 답을 온몸으로 받아냈습니다. 밀실이라는 단 하나의 공간, 전화라는 단 하나의 매개체만으로 러닝타임 내내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웰메이드 스릴러의 진수였습니다. 밀실 스릴러가 만들어내는 공포의 질감스릴러 영화를 꽤 많이 봐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 앞에서는 솔직히 그 자신감이 무너졌습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벨 소리 하나가 울리는 순간, 제가 느낀 건 단순한 긴장감이 아니었습니다. 사방이 막힌 밀실(密室) — 즉 외부와의 연결이 완전히 차단된 폐쇄 공간 — 이라는 설정이, 관객의 도피 욕구마저 원천봉쇄해버린다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습니다.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클로즈..
세상에 진짜 '사고'는 없다는 말, 들으면 섬뜩하지 않으신가요? 영화 〈설계자〉는 바로 그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모든 죽음이 철저히 계산된 결과라는 설정은 오프닝부터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저는 강동원이라는 이름만 믿고 극장을 찾았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 선택을 반쯤 후회했습니다. 차가운 설정이 만든 첫인상 — 오프닝의 함정혹시 영화를 보기 전, '청부살인을 조작한다'는 장르 자체가 식상하게 느껴지셨나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설계자〉의 출발점은 조금 달랐습니다.이 영화의 설정 핵심은 단순한 살인이 아닌 '완벽한 사고사 위장'입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이 여기서 빛을 발합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카메라 앵글, 조명, 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선빈과 이지훈이라는 조합, 거기에 기억 상실과 부부의 비밀이라는 설정까지 얹히니 기대치가 자연스럽게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 든 첫 감상은 "아, 이 길이구나"였습니다. 뻔히 보이는 코너를 돌아 예상한 그 자리에 정확히 멈춰 선 영화, 〈당신이 잠든 사이〉 이야기입니다. 클리셰 — 낡은 공식, 그래도 왜 보게 되는가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구조, 어디서 많이 봤는데"였습니다.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은 아내, 그 곁을 헌신적으로 지키는 남편, 그리고 그 다정함 뒤에 숨겨진 서늘한 진실. 이른바 가스라이팅(Gaslighting) 서사의 전형적인 뼈대입니다. 여기서 가스라이팅이란 가해자가 피해자의 현실 인식을 교란시켜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
달리는 트렁크 안, 카메라 하나, 그리고 아침까지 돈을 벌어야만 살 수 있다는 조건. 영화 〈드라이브〉의 설정을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박주현 주연의 이 작품은 도심 한복판에서 납치된 유튜버가 달리는 차 트렁크에 갇힌 채 라이브 방송을 이어가야 하는 극한의 원 신(One Scene) 스릴러입니다. 초반 30분은 정말이지 숨이 막혔습니다. 그런데 중반을 넘어서면서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트렁크 하나로 영화 전체를 버티는 배경제가 직접 극장에서 봤는데, 상영이 시작되고 첫 장면부터 구도가 달랐습니다. 화면 전체가 어두운 트렁크 내부로 고정된 채, 배우의 얼굴과 스마트폰 화면만 번갈아 보였습니다. 이른바 원 로케이션(One Location) 방식, 즉 단 하나의 물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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