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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처음엔 걱정이 앞섰습니다. 화려한 무대 전환도, 대형 세트도 없다는 걸 알고 들어간 공연이었거든요. 그런데 조명이 켜지는 순간, 그 걱정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뮤지컬 시카고는 '덜어냄'으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공연입니다. 밥 포시(Bob Fosse) 특유의 절제된 안무가 어떻게 1920년대 미국의 부패한 사법 시스템을 무대 위에서 해부하는지, 직접 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했습니다.

밥 포시가 세트 대신 선택한 것
뮤지컬 시카고의 무대 구성은 브로드웨이 기준으로도 꽤 이례적입니다. 오케스트라를 객석 뒤나 피트(Pit)에 숨기는 대신, 무대 정중앙에 계단식으로 올려놓습니다. 연주자들이 배우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존재하는 셈입니다. 처음 이 배치를 봤을 때 제가 느낀 건 '생경함'이었는데, 금세 그게 의도된 설계라는 걸 알아챘습니다.
안무가 밥 포시(Bob Fosse)가 구축한 보드빌(Vaudeville) 미학이 그 핵심입니다. 보드빌이란 20세기 초 미국에서 유행한 버라이어티 쇼 형식으로, 저속하고 관능적인 퍼포먼스를 대중 앞에 적나라하게 펼치는 쇼 문화를 의미합니다. 시카고는 이 형식을 의도적으로 차용해, 살인을 저지른 여수들의 이야기를 마치 쇼처럼 소비하는 대중과 언론을 냉소적으로 비튼 작품입니다.
포시 스타일(Fosse Style)의 움직임은 외향적인 과시와는 정반대 방향을 향합니다. 안쪽으로 굽힌 무릎, 둥글게 말린 어깨, 손목을 꺾은 채 미세하게 튕기는 핑거 스냅(Finger Snaps). 쉽게 말해, 에너지를 바깥으로 폭발시키는 대신 몸 안으로 응축시키는 방식입니다. 제가 실제로 앉아서 본 앙상블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무기 같았습니다. 크게 움직이지 않는데, 오히려 더 서늘했습니다.
- 오케스트라를 무대 중앙 계단식으로 배치 — 음악과 퍼포먼스를 동등한 층위에 둠
- 포시 스타일 핵심 3요소: 안쪽으로 굽힌 무릎 / 말린 어깨 / 핑거 스냅(Finger Snaps)
- 중절모를 극단적인 각도로 눌러쓰는 실루엣 연출 — 암전 속 관능적 그림자 활용
- 보드빌 형식 차용 — 살인을 쇼처럼 소비하는 언론·대중에 대한 풍자 구조
Cell Block Tango가 무서운 이유
제가 이 공연에서 가장 오래 기억하게 될 장면은 단연 'Cell Block Tango'입니다. 감옥 철창도, 복잡한 무대 장치도 없습니다. 붉은 스포트라이트, 의자 몇 개, 그리고 여섯 명의 여수. 그게 전부입니다.
각 인물이 자신의 살인 동기를 탱고(Tango) 리듬에 얹어 독백하는 이 넘버의 구조는, 뮤지컬 분석 측면에서 '비선형 내러티브(Non-linear Narrative)'의 교과서로 꼽힙니다. 비선형 내러티브란 사건을 시간 순서 없이 각자의 시점과 감정에 따라 파편화해 전달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여섯 명이 교차로 말하고 움직이면서도 하나의 탱고가 완성되는 이 설계는, 보면 볼수록 치밀하게 느껴집니다.
실제 공연에서 이 장면을 보면서 제가 느낀 감정은 '오싹함'에 가까웠습니다. 잔혹한 내용인데 리듬은 관능적이고, 인물들은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하면서도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대규모 세트였다면 오히려 그 서늘함이 희석됐을 겁니다. 최소한의 조명과 동작만으로 긴장감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이 방식은, 포시 스타일이 단순한 안무 취향이 아니라 주제를 전달하는 도구임을 증명합니다.
뮤지컬 평론계에서도 시카고는 '보컬보다 안무와 연기력이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한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실제로 브로드웨이 공식 사이트(출처: Chicago The Musical 공식 사이트)에 따르면, 시카고는 1996년 리바이벌 이후 브로드웨이 역사상 가장 오래 공연된 아메리칸 뮤지컬 기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 자체가 작품의 연출 방식이 얼마나 시대를 타지 않는지를 방증합니다.
시카고, 누가 보면 재미있고 누가 힘들까
제 경험상 이 뮤지컬은 진입 장벽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걸 솔직하게 말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풍자의 핵심은 1920년대 미국 금주법 시대(Prohibition Era)의 사법 왜곡과 황색 언론(Yellow Journalism)입니다. 황색 언론이란 자극적인 보도로 대중의 관음증을 자극해 판매 부수를 늘리던 당시 미국 언론 문화를 가리킵니다. 이 맥락을 모르면, Cell Block Tango의 독백들이 왜 그렇게 연출됐는지, 'Roxie'라는 캐릭터가 왜 끝까지 주목받고 싶어 하는지가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제가 직접 관람 전에 배경을 조금 공부하고 갔는데, 그 준비가 관람 경험을 크게 바꿨습니다.
시카고 영화(2002년, 롭 마샬 감독)를 먼저 보고 가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뮤지컬과 영화는 연출 방식이 다르지만, 캐릭터와 넘버의 흐름을 미리 파악하면 무대 위 퍼포먼스에 훨씬 깊게 몰입할 수 있습니다. 제가 주변에 권유할 때도 항상 이 순서를 추천합니다.
반면, 화려한 무대 전환과 대규모 세트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처음 몇 넘버가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 옆자리에 앉았던 분이 공연 초반에 조금 지루해 보였는데, Cell Block Tango 이후로는 완전히 빠져든 것 같았습니다. 그 변화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꽤 흥미로웠습니다. 뮤지컬 자체가 오래된 작품이다 보니 올드한 감성이 느껴질 수 있다는 점도 사실입니다. 다만 저는 그게 단점이라기보다 재즈 오케스트레이션 본연의 질감을 그대로 살린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공연 접근성과 관련해서는, 한국뮤지컬협회(출처: 한국뮤지컬협회)에서 국내 라이선스 뮤지컬 일정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시카고 내한 혹은 국내 제작 공연 일정을 미리 체크해 두는 것을 권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뮤지컬 시카고, 뮤지컬을 처음 보는 사람도 재미있게 볼 수 있나요?
A. 재미있게 볼 수 있지만, 배경 지식이 있으면 훨씬 더 몰입됩니다. 1920년대 미국의 황색 언론과 사법 부패라는 맥락을 모르면 단순한 댄스 퍼포먼스로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영화 시카고(2002)를 먼저 보고 가면 캐릭터와 스토리 파악에 도움이 됩니다.
Q. 포시 스타일 안무가 다른 뮤지컬 안무와 다른 점이 뭔가요?
A. 포시 스타일(Fosse Style)은 에너지를 바깥으로 폭발시키는 대신 몸 안으로 응축시키는 것이 특징입니다. 안쪽으로 굽힌 무릎, 말린 어깨, 핑거 스냅 등 절제된 동작으로 관능과 긴장감을 동시에 만들어 냅니다. 대부분의 브로드웨이 안무가 크고 화려한 움직임을 지향하는 것과 정반대 방향입니다.
Q. Cell Block Tango는 왜 그렇게 유명한가요?
A. 여섯 명의 여수가 각자의 살인 동기를 탱고 리듬에 얹어 독백하는 비선형 내러티브 구조가 핵심입니다. 철창도 대형 세트도 없이 붉은 스포트라이트와 의자만으로 극한의 심리적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형식과 내용의 간극이 만드는 그 서늘함이 이 장면을 오래 기억하게 만듭니다.
Q. 시카고 뮤지컬이 오래된 작품인데 지금 봐도 재미있나요?
A. 1996년 브로드웨이 리바이벌 이후 현재까지 공연을 이어오고 있는 것 자체가 작품의 힘을 보여줍니다. 다소 올드한 감성이 느껴질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재즈 오케스트레이션 본연의 질감을 살린 결과입니다. 언론과 대중의 관음증이라는 주제는 오히려 지금 더 유효합니다.
결론
뮤지컬 시카고를 보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건, '이렇게 적은 걸로 이렇게 많은 걸 할 수 있구나'였습니다. 밥 포시의 연출은 덜어냄 자체가 메시지라는 걸 증명합니다. 세트가 없어서 배우의 신체가 보이고, 배우의 신체가 보여서 풍자의 날이 객석까지 그대로 전달됩니다.
관람을 고려하고 있다면, 사전 준비로 영화 시카고(2002)를 먼저 보고 1920년대 미국 금주법 시대의 배경을 간단히 파악해 두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 작은 준비가 관람 경험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모든 넘버가 완성도 높고, Cell Block Tango 한 장면만으로도 티켓값이 아깝지 않은 공연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00oBK-x1pVk&list=RD00oBK-x1pVk&start_radi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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